트라우마틱 이벤트(traumatic event, 심리적 충격을 주는 사건) 발생 후 조직 안에서
서로 다른 반응이 왜 생기고, 그걸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소방·경찰·군 등 위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강함’은 감정을 숨기는 게 아니다.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서로의 회복을 지켜주는 것이 진짜 강인함이다.

트라우마 관리와 조직문화의 건강성: 강인함의 재정의
“그날, 손을 잡고 있었어요.”
얼마 전 한 경찰서에서 상담을 진행하면서 들은 말이었다.
아파트 베란다에 매달린 여성을 구조하러 출동한 경찰 두 명은
각자 한쪽 팔을 잡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지휘를 맡은 간부는 아래에서 상황을 통제했고,
현장에는 긴장과 절박함이 뒤섞여 있었다.
결국 손이 미끄러지며 여성을 놓치게 되었고,
그날은 모두에게 길게 남는 밤이 되었다. (해당사건은 각색되었습니다.)
소방·경찰·군.
‘강해야 한다’는 말이 자연스러운 조직들이다.
이들은 위험을 향해 달려가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지켜야 하며,누군가의 절망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감정의 흔들림은 종종 ‘약함’으로 간주된다.
이런 문화는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서서히 금이 가는 조직의 구조를 만든다.
1. 같은 사건, 다른 반응(증상) — 누구의 반응이 ‘정상’일까
일주일 후, 심리 지원이 해당 경찰서에서 이루어졌다.
두 명의 경찰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한 명은 수면의 어려움, 자책, 반복적 장면 재경험 등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을 호소하며 “그 손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한 명은 “3일 정도 잠을 설쳤지만, 지금은 괜찮다”고 했다.
현장의 동료들도 “한 명이 유독 힘들어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정상’일까?
누가 더 강한 사람일까?
2. 강인함은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니다
우리는 흔히 ‘강한 사람’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진짜 강인함은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다루는 능력이다.
불안, 슬픔, 분노는 비정상적인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경고등’이자 ‘조정 시스템’이다.
트라우마 반응은 비이성적이거나 약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그건 위험을 감지하는 뇌가 보내는,
정상적인 생리적 반응이다.
즉, 감정이 요동친다는 건 ‘고장 난’ 게 아니라 ‘아직 회복 중’이라는 신호다.
트라우마 반응의 정도는 개인의 성격이나 의지 문제가 아니다.
신체적, 생리적, 경험적, 관계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즉, ‘사건의 강도’보다 ‘사건을 경험한 사람의 내적·외적 자원’이 더 중요하다.
(개인에게 나타나는 증상이 궁금하다면 앞의 글을 보아주세요. 혹은 차이가 나는 이유를 찾으신다면 마찬가지)
3. 사건 이후 누가 곁에 있었는가?
이 사건에서 인상 깊었던 건, 경찰서 분위기였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격의 없이 지내는 팀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쾌활했지만,
그 속에는 “내가 출동했어야 했는데”라는 죄책감을 가진 중간간부가 있었고,
또 “괜찮아 보여야 한다”는 조용한 압박감이 공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트라우마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회복 요인은
“사건의 강도”가 아니라 “사건 이후 누가 곁에 있었는가”다.
즉, 누가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는지,
누가 “그럴 수 있다”고 말해주었는지가 회복의 방향을 결정한다.
4. 강인함의 정의를 다시 쓴다면
소방·경찰·군 같은 조직은 ‘이성적 판단’과 ‘냉정함’을 미덕으로 삼는다.
하지만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다.
소방관의 화상, 경찰의 부상, 군인의 피로 누적은
직업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신체적 위험이다.
그런데 왜 심리적 상처만은 개인의 약함으로 여겨질까?
트라우마 반응은 이 일의 업무 특성상 예측 가능한 결과다.
그러므로 개인의 문제로 낙인찍을 게 아니라
직업적 위험요소로서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화상에 연고를 바르듯, 마음의 상처에도 돌봄이 필요하다.
이는 ‘치유’라기 보단 오히려 전투 지속력(operational readiness)을 위한 관리다.
5. 건강한 조직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다
사건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는 동료가 있다.
하지만 그 평정심이 진짜 회복인지,
아니면 감정을 차단한 방어기제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된 사람은
장기적으로 관계 단절, 무감동, 냉소, 공격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사람은 조직의 ‘모범 사례’처럼 보일수있지만,
조용히 정서적 탈진(burnout)이 진행 중일 수도 있다.
‘감정을 숨기는 조직’은 단기적으로 단단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집단 탈진과 냉소가 쌓인다.
반대로, 감정을 공유하고 서로를 지지하는 조직은
진짜 의미의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을 형성한다.
진짜 강한 조직은, 감정을 다룰 줄 아는 조직이다
현장의 강인함은 감정을 지우는 데서 오지 않는다.
감정을 인식하고, 서로의 흔들림을 견뎌주는 데서 온다.
트라우마 반응을 드러내는 사람이 약한 게 아니라,
그 반응을 수용하지 못하는 조직이 약한 것이다.
“감정을 다룰 줄 아는 조직,
그것이 진짜 강한 조직이다.”
혹시 당신의 동료 중에도,
“그날 이후 잠을 설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나요?
그 말은 약함의 신호가 아니라 회복의 시작입니다.
오늘 그 동료에게 짧게라도 물어보세요.
“괜찮아?”
그 한마디가, 다시 일어서는 첫 걸음이 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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